이 글을 이렇게 허락없이 올려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공감하고 함께 나누고 싶은 글이기에 이렇게 게시 합니다.
출처 : 표주박 통신 103호 중 기세춘 선생님의 글
1236804897.hwp표주박 통신 103호
교회에 바라는 것
‘살림교회’ 규약을 보거나 이건종 목사의 고별설교 ‘평화의 인사’를 보면 내가 살림교회에 할 말은 별로 없다. 내가 한국의 교회들에게 하고 싶은 말들이 그 두 문건 속에 상당히 많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나는 살림교회는 예배에만 가끔 참석하여 보았기에, 살림교회가 1993년 처음으로 제정하고, 2005년 12월에 개정하여 발표한 규약을 얼마나 실천하였는지는 모른다. 물론 규약이란 그렇게 실천하겠다고 스스로 다짐하는 것이며 방향을 알려 주는 것이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꼭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러한 규약을 만드는 과정에서 교인들과 많은 신앙토론을 거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매우 다행스런 일이다. 한국의 모든 침례교회가 다 각각 자신들의 규약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규약은 매우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 원래 침례교회가 추구하던 평신도교회의 정신이 최근에는 거의 다 퇴색되어 다른 교회들처럼 위계체계로 돌아가는 듯한 인상을 줄 때 살림교회가 펼친 이와 같은 시도는 다행스런 일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성도가 하느님이 불러 세운 동등한 목회자로 서 있게 되는 교회는 매우 의미가 있다. 교회는 바로 동등한 목회자로 세워진 개개인 그들이 혼자서 단독자로 있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를 이루어 한 몸을 이루는 것이라야 할 것이다.
70년대 내 한 친구가 부산에서 처음으로 교회를 열어 일을 시작할 때다. 한 교회의 부목사로 있다가 독립 목회를 하기로 하여 갔었다. 첫 예배는 자신들이 세를 얻어 쓰는 집에서 아내와 딸과 처제와 함께 예배를 하였단다. 그리고 설립예배를 할 때는 여러 곳에서 축하하러 온 사람들과 함께 많은 사람이 예배를 하였다. 나는 그 친구 집에서 하루를 자면서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때 나눈 이야기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우리가 배웠듯이 모두가 다 제사장이라는 것, 모두가 다 하느님의 형상을 받아 만들어졌다는 것, 교회의 모든 위계질서는 최소화되어야 한다는 것을 지키되, 목회자 자네가 군림하려 하지 말고 이곳에 오는 모든 성도가 목회자만큼의 수준으로 성장할 수 있는 깨어 있고 열린 목회를 하면 좋겠네. 대개 목사들은 신도들이 자기의 목회지침에 따르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서 신도들을 우매하게 머물게 하는 수가 많은 데 꼭 자네 수준만큼 성숙된 교인이 되게 목회를 하기 바라네.’ 뭐 대강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그 뒤 그는 좋은 목회를 하였다고 스스로 말하였다. 그러나 그가 떠난 뒤 그 교회는 매우 상당히 다른 방향으로 바뀌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대개의 한국교회는 모든 신도들이 각자 자기 처지에 맞는 신앙을 가지게 하지 않는 것 같다. 교파에 맞는 일률적 잣대가 틀에 맞게 교인을 기르려 하는 눈치가 너무 세다. 그래서 신도를 조직하고, 틀 속에 넣어서 열린 신앙을 가지지 못하게 한다. 이른바 성직자들의 지도에 잘 훈련된 교인을 길러내려 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각자 자기 자신이 치열한 그리스도 체험을 통한 신앙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가르쳐준 것을 따르는 것을 마치 신앙으로 믿게 만든다. 자기신앙이 아니라 남이 만든 신앙의 옷을 입고 다니게 만든다. 체험이라고 하는 것까지도 가끔 그 가르쳐진 틀 안의 체험으로 머무는 수가 많다. 그것은 가짜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에 대한 직접 체험 없는 교인은 체험이 있을 때까지는 가짜다. 자기가 스스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영성을 풍성하게 하지 않고 겉으로 빙빙 돌게 한다. 그 대신 교회 안의 온갖 직책을 맡아 일을 하게 한다. 그 일과 신앙은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처음에는 원칙상 일치하는 것이었지만, 조직화한 교회에서는 조직의 한 부서를 맡았을 뿐 신앙과는 크게 관련이 없는 것이 많다.
한국교회는 지나치게 크려고만 한다. 작은 교회, 작은 공동체교회를 추구하는 교회는 매우 적다. 대형교회는 조직일 뿐 교회라고 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오늘날의 도시화한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활형태와 매우 일치한다. 상당히 많은 도시인들은 ‘익명성’을 선택한다. 이웃에 살아도 000동 XXX호 아저씨나 아줌마로 통하면 족하다. 문패도 명패도 없는 집과 편지통을 달고 한 아파트 한 라인에서 몇 년을 살아도 얼굴이나 약간 알뿐 전혀 그 외의 다른 것은 몰라도 살 수 있다. 그것이 오히려 편하다. 친한 것은 이미 그 이전에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느끼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내막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옛날에 알았던 이들과 서로 만나고 연락하고 하루에도 몇 번 씩 전화를 하는 것은 외롭기 때문이다. 현대 도시인들은 외로워도 이웃을 새로 사귀려 하지 않는다. 그것에 따른 여러 가지 부담을 가지기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삶의 모습이 교회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그런데 작은 교회에 가면 모든 것을 다 드러내어 놓아야 하는 부담이 있다. 그러나 큰 교회에서는 그냥 예배에 참석하고 친절하게 인사하고 헌금을 꼬박꼬박 잘하면 족할 때가 많다. 물질에 지나치게 경도된 한국교회에서 신앙이 좋은 것을 보이는 것은 헌금을 잘하면 된다. 아무런 부담이 없다. 요사이는 인터넷 헌금까지 생겼다. 대형교회일수록 이러하다. 교회 형제들간의, 성도들간의 친교도 없다 할만큼 어려워졌다. 친교가 긴밀하지 않다면 그것은 벌써 교회는 아니다. 몇 천 명과 몇 만 명을 넘는 교회라면 그것은 벌써 교회가 아니라 하나의 도시다. 그러므로 대형교회는 도시에 맞는 생활형태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타락한 교회요 변질된 교회의 모습이다.
아무리 깎아서 본다고 하더라도, 대형교회, 조직이 꽉 짜여있고, 돈으로 치장된 교회에서는 결코 예수를 따르거나 그리스도를 체험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곳에 그가 머물러서 누구인가를 기다린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모든 곳에 다 있다는 하느님이지만, 그를 만날 수 있는 곳은 따로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삶을 매우 삼가야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는 것은 어느 한 개인에게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조직은 생명을 메마르게 하고, 역동성을 제한한다. 교리가 정교하고 탄탄하면 신학은 있을지 모르나 생명과 자유는 없다. 그것이 없는 곳에 생생한 그리스도 체험이 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래서 나는 우리 한국교회가 살아서 움직이는 교회가 되려면 몇 가지 주의하고 실천하여야 할 것들이 있다고 본다. 모두가 다 초대교회를 교회의 이상으로 삼지만, 지금은 어디에서도 그 모습을 그대로 볼 수는 없다. 물론 초대교회라 하여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문제해결이 지금과 좀 달랐던 것은 분명하다. 가능하면 한국교회들은 초기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이 필요할 때다.
우선 돈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 헌금과 교회재산과 건물에 집착하는 것은 타락의 첩경이다. 교리와 조직과 교파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것들은 항상 살아서 직접 자신이 구원과 해방에 이르는 그리스도체험을 방해한다. 이성과 형식과 지식으로 알고 가는 교인을 만들 수는 있을 것이다. 모든 교단들은 거대한 조직, 지방과 중앙과 연합을 지으려는 조직에 지나치게 힘을 기울인다. 그것은 정치일 뿐 신앙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목회자와 평신도, 성직자와 일반 신도의 구별이 없어야 한다. 이상스럽게도 종교위계체계는 점점 더 심화된다. 직업목회자는 신학을 공부한 사람에게서만이 아니라, 평신도 중에서 영성이 출중하고 그렇게 살도록 소명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한 번 됨으로 영원히 그 일을 맡는 것이 아니라, 그가 살아서 팔팔한 신앙을 가지는 한은 그 일을 맡을 수 있다. 그것이 힘에 부칠 때는 본연의 직업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한국의 지금 상황;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문제에 아주 깊이 관여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동시에 우리를 둘러싼 환경, 즉 자연과 문화의 문제를 도외시하고는 불가능하다. 이러한 것들은 의식하고 인식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로 실천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교리도, 조직도, 예배의식도, 삶의 자세도 모두 소박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소박한 사람들이 한 방향을 바라보고 다양하게 걸어가는 것,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새로 찾아야 할 교회공동체라고 본다. 한 곳에 모여서 사는 것만이 아니라, 여러 곳에서 흩어져 살고, 다른 것을 추구하여 산다고 할지라도 크게 한 방향을 바라보고 살아나갈 때 같은 영의 인도를 받게 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성공동체가 그래서 아름다운 것이다. 영성은 일상생활을 떠난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진리를 실현하는 힘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일상생활에서 진리실현에 방해되는 온갖 요소를 뽑아버리는 실천은 그래서 매우 귀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천은 누가 강요하여서가 아니라, 한 개인이 스스로 깨닫고 감동을 받아서 속으로부터 들리는 소리를 따라 갈 때 이루어질 것이다. 그 소리를 따라간다는 것은 이미 잘 닦여진 길을 밝게 비추는 우리 속의 안내자를 따라가는 것이 된다. 한국교회는 성도 개인이나 교회 단체는 모두 꼭같이 그 속에 있는 빛을 찾고, 그 속에 있는 선생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것이 곧 하느님의 빛을 찾고 하느님의 소리를 따라 가는 길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리스천은 예수의 종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직접 그리스도를 체험하여 그의 동료로 사는 사람을 일컫는다. 그렇게 될 때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나란히 걸어가게 된다.(照: 2009. 2. 18. 대전 ‘살림교회’ 목회자 이ㆍ취임식에 즈음하여.)

